크라운에서 냄새가 나요 feat. 슈뢰딩거의 어금니 ep.1
크라운은 자연치아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치료다.
크라운이 불가능하다면, 발치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크라운에 탈이 나도 재도전의 기회가 있다는 점이고,
불행인 건, 언제 재도전을 할 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약 3년 쯤 전, 60대 중반이 되신 은사님께서 내원하셨다.
내 결혼식에서 주례를 해주신 고마운 분이시다.
"크라운에서 냄새가 난 지 좀 됐는데,
가능하면 치아를 살려서 쓰고 싶네."
오래된 크라운...
크라운 내부의 치아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크라운을 뜯어보기 전에 치아의 상태는 확률과 파동으로서만 존재하며,
크라운을 뜯고 치아 상태를 확인해야만 그 실체를 갖는다.
??!! |
그 중에서도 브릿지로 연결된 크라운은, 어금니의 생존확률을 팍 떨어뜨린다.
제발 브릿지만은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파노라마 사진을 봤지만,
하... 길게 연결된 브릿지다.
브릿지가 왜 더 심란한지 간단하게만 이야기 해보자면.
한 개짜리 크라운은 혼자 있기 때문에, 탈이 날 때 증상을 그나마 일찍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잇몸이 상해서 치아가 조금씩 흔들릴 정도가 됐을 때..
한 개짜리 크라운은 흔들리고 움직이면서 통증을 유발하여 치과를 찾을 생각이 들게 만드는데..
크라운이 여러 개 묶여있으면(splinted), 옆 치아랑 붙어있으니 흔들리지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어서, 이를 일부러 이용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흔들림이 없으니 불편감도 적고.. 그러다보니 문제가 뒤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맨 끝에 epilogue 참고)
게다가 치아별로 조금씩 동요도의 차이가 있다보니,
일부 치아에서만 접착용 시멘트가 더 잘 녹아서 탈이 나는 경우도 있다.
이래저래 브릿지는 정말 부득이한 경우에만 하는 게 좋다.
(부득이한 경우란, 어차피 옆 치아도 크라운을 같이 해야 하는 경우라든가.. 임플란트가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라든가.. 브릿지 얘기는 여기까지만)
크라운이 브릿지의 일부라서 발치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지만,
발치 확정을 짓기 위해서라도 저 브릿지를 제거해야 한다.
슈뢰딩거의 상자를 살살 열어본다.
치아의 머리가 없다.
아니, 있다. 아주 조금.
크라운 아래로 심하게 썩은 치관 |
이 어금니는 살아있는 걸까, 죽어있는 걸까.
크라운을 열어 직접 눈으로 봐도 모르겠다.
신기한 건, 저렇게 될 때까지 하나도 안 아프셨다는 거.
이쯤되면 어금니의 발치 - 사망선고를 내려야 할 것 같지만,
은사님의 말씀도 있으시고 해서 조금 더 노력해보기로 했다.
상한 부분을 조심조심 더 걷어낸다.
그래도 뿌리는 남아있다. 충치도. |
썩은 부분이 툭툭 걷어져 나간다.
화석을 발굴하는 기분이다.
여기서 더 걷어내면 남아나는 게 없을 듯하다.
선생님을 일으켜 세워드리고 사진을 보여드린다.
이제 어금니의 생사를 정해야 한다.
"선생님, 온전히 남은 부위가 너무 없네요.
열심히 수복해서 크라운을 다시 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얼마 못 가서 탈이 날 것 같습니다."
(대충 사망했다는 말)
"불가능하지 않다면, 시도해 주세요.
탈이 나서 뽑게 돼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대충 아니라는 말)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할까...
사실, 나도 치아를 뽑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살려서 쓰는 걸 선호하기는 한다.
마침 은사님께서도 그걸 간절히 원하시기도 하니,
일단은 발치 전에 가능한 치료를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마음을 먹었으면, 최선을 다해서 임해야지.
이제 어금니의 숨통이 끊어지기 전에 얼른 심폐소생술부터 해야한다.
무통마취 후, 곧바로 신경치료 준비.
신경치료를 길게 끌면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부위가 깨져나갈 위험도 있으니,
최대한 빨리 집중해서 끝내야 한다.
그래서 1회만에 끝냈다, 신경치료.
다행히 신경관이 막혀있지 않아서, 당일발수근충 완료 |
4일 뒤.
치관의 상한 부위를 마저 제거하고, 코어로 수복해야 크라운을 씌울 수 있다.
상한 부위를 정말 조심조심 제거한다.
흔들리는 초점.. 떨리는 것은 카메라인가 내 마음인가 |
아무리 봐도, 이대로는 크라운이 붙어있을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ferrule을 더 얻을 수 있게 잇몸을 살짝 내려주고,
조금이라도 레진코어가 잘 붙어있으라고 포스트도 넣고,
그 위에 레진코어를 정성껏 쌓는다.
치아가 조금씩 모양을 갖춰간다 |
잇몸이 어느 정도 아물어야 거기 맞춰서 보철이 들어갈 수 있으니,
오늘은 손으로 임시치아를 만들어서 끼워드린다.
잇몸이 아물 때까지 충분히 기다리기는 동안 다른 부위 치료를 진행.
그리고 2주 뒤.
그 사이 잇몸이 잘 회복됐다.
노랗게 변한 임시치아. 카레를 드셨단다. |
이제 깔끔해진 잇몸에 맞춰서 구강스캔을 해서,
다시 1주 뒤 새로 만든 지르코니아 크라운을 셋팅.
그 사이 앞쪽의 치아상실 부위는 임플란트 식립 |
이제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어금니 크라운.
내눈엔 괜찮아 보이는데, 은사님은 어떠실까.
"수고많았어요. 역시, 하면 되는군요. 이제 잘 써볼게요. "
다행히 만족하신다.
이렇게 어찌어찌 크라운 재제작 단계까지 완료했지만,
이렇게 살려낸 크라운을 얼마나 오래 사용하실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혹시 몇 달만에 똑 부러져서 오실 수도 있으니,
힘줘서 단단한 음식 드시는 건 자제해주시고, 꾸준한 정기점검을 당부드리면서
오래된 크라운 교체 치료를 일단락 지었다.
그리고 이렇게 교체한 크라운 나이도 3살이 넘어간다.
지금도 꾸준히 정기점검을 받으시면서, 잘 사용하고 계신다.
그 사이, 오래된 브릿지가 새 크라운과 임플란트로 교체되었다 |
이 케이스는 내 보존 치료의 한계를 넓혀주었던 소중한 과정이었다.
이렇게 심하게 상한 치아도 수복을 해서 장기간 잘 사용하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섣불리 치아의 사망판정을 내리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치아의 발치여부를 판단하는 일에 더 신중해졌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와는 다르게,
크라운 속의 어금니는 상자를 열어봐도 그 상태가 확률로 존재하는 것이다.
치료가 끝나기 전까지는.
슈뢰딩거의 어금니. 생존 판정. |
+ epilogue)
하지만 슬프게도...
크라운을 뜯어서 확인하자마자 어금니가 사망했음을 바로 알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얼른 사망판정을 내려드리는 것이 낫다.
1년쯤 전,
역시나 오래된 크라운에서 냄새가 나신다며
우리 병원에 내원하신 또 다른 어르신.
크라운 냄새도 비슷하고, 브릿지인 점도 비슷하고..
심지어 위치도 비슷하시다
그런데 엑스레이에서 크라운 아래 경계 부분의 검은 선이 넓고 진하다.
크라운 아래로 탐침을 넣어보니 탐침이 쑥 들어간다.
아무래도 발치각인데...
하지만 은사님 케이스의 경험도 있고 해서,
크라운을 제거한 뒤에 상태를 보고 발치여부를 판단하자고 말씀드린 뒤
크라운을 브릿지에서 분리하기 시작.
원래는 브릿지를 다 제거하는 게 원칙이겠지만,
앞에 크라운을 조금이라도 더 쓰고 싶어하셔서 의심 크라운만 분리해서 제거하기로.
긴장되는 마음으로 크라운을 분리해보니, 헐...
치아...였던 것 |
그냥 치관부분이 아예 없다.
이래서 브릿지가 무서운 거다.
크라운 아래 치아가 저렇게 싹 녹아버렸지만,
옆의 크라운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흔들림도 없고 별 불편함을 못 느끼고 계셨던 거다.
미련을 못 버리고 PA 사진을 한 번 찍어본다.
...... |
말없이 두 장의 사진을 보여드리니,
어르신께서도 고개를 끄덕거리신다.
동의를 얻어 곧바로 발치를 한다.
발치라기 보다는, 잔존치근 제거가 맞는 듯.. |
지금은 다행히 발치 부위에 임플란트를 심고 잘 사용하고 계신다.
그리고 더 다행인 건,
2개 크라운이 연결된 브릿지에서,
앞의 크라운은 제거하지 않고 살려서 계속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거다.
하지만 이것도 더 늦었으면 장담할 수 없었다.
크라운 재도전의 기회를 더 빨리 선택하셨다면,
뒤의 치아도 다시 크라운을 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크라운 재도전의 기회를 더 늦게 선택하셨다면,
앞의 치아도 크라운을 제거하게 됐을까?
알 수 없다.
크라운 아래 치아는 크라운을 벗겨 보기 전에는 확률로만 존재하며,
그나마 그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꾸준한 치과검진을 받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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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의료법 제56조 1항의 의료법을 준수하여 치과의사가 직접 작성하였습니다.
실제 내원 환자분의 동의하에 공개된 사진이며,
동일한 환자분께 동일한 조건에서 촬영한 사진을 활용하였습니다.
1. 본문의 치료 내용 : 신경치료, 크라운
치료 후 생길 수 있는 부작용 : 재신경치료, 발치
치료기간 : 2022.08.01~ 2022.08.30
경과체크일 : 2024.07.15
2. epilogue 치료 내용 : 발치, 임플란트
치료 후 생길 수 있는 부작용 : 임플란트제거
치료기간 : 2024.01.12~ 2024.07.19
개인에 따라 진료 및 치료방법이 다르게 적용될 수 있으며,
효과와 부작용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점을 안내드리고 동의하에 치료 진행합니다.
진료 전 전문 의료진과의 충분한 상담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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